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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 포스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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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 포스카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역사적인 궁전으로, 과거 "두 개의 탑이 있는 집"으로 알려진 비잔틴 궁전 부지에 건설되었다. 1453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매입하여 베네치아 후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했으며, 이후 프랑스 국왕 앙리 3세, 러시아의 표트르 1세 등 저명인사들이 머물렀다. 현재는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며, 2013년에는 LEED 지속 가능성 인증을 획득했다. 내부에는 카를로 스카르파의 건축적 개입과 마리오 시로니, 마리오 델루이지의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대운하를 조망할 수 있는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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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 포스카리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카 포스카리
위치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 양식고딕 양식
소유주카 포스카리 베네치아 대학교
건축가바르톨로메오 본
개장일1453년
건축 세부 정보
용도궁전
추가 정보

2. 역사

카날 그란데를 향한 카 포스카리의 파사드


카 포스카리가 위치한 자리에는 본래 "두 개의 탑이 있는 집"(Casa delle due torriit)이라 불리던 비잔틴 양식의 궁전이 있었다. 1429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매입한 이 건물은 군사 지도자 잔프란체스코 곤자가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거처로 잠시 사용되었으나, 이들이 공화국을 등지면서 소유권은 다시 공화국으로 넘어왔다.

1453년, 당시 도제였던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경매를 통해 건물을 사들여 기존 건물을 허물고, 대운하에 면한 현재의 웅장한 궁전을 베네치아 후기 고딕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건축가 Bartolomeo Bono|바르톨로메오 보노it가 설계를 맡았으며, 이 건축은 테라페르마에서 베네치아의 영토 확장을 이끈 포스카리 도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포스카리는 궁전 완공 직전인 1457년 실각하여 새 궁전에는 거의 거주하지 못했다.

포스카리 가문 이후 카 포스카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빈 접대 장소로 쓰였으며, 1574년에는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머물기도 했다. 이후 소유주 변경, 화재, 병영 사용 등 다양한 변화를 겪다가 1868년 이탈리아 왕국 최초의 상업 고등 교육 기관인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본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복원되었으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안전성과 실용성을 높였다. 2013년에는 에너지 효율성과 환경 관리 노력을 인정받아 역사 건물로는 이례적으로 LEED 지속 가능성 인증을 획득, [http://www.usgbc.org/articles/oldest-leed-certified-building-world 해당 인증을 받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되었다. 현재 궁전의 일부 홀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2. 1. 초기 역사



포스카리 거리(Calle Foscari)를 향한 파사드


카 포스카리가 위치한 자리에는 본래 "두 개의 탑이 있는 집"(Casa delle due torri|카사 델레 두에 토리it)으로 불리던 비잔틴 양식의 궁전이 있었다. 이 건물은 낮은 중앙부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탑이 솟아 있는 구조였다. 1429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베르나르도 주스티니아니로부터 이 건물을 매입하여, 공화국 군대의 부(副)선장이자 만토바 후작이었던 잔프란체스코 곤자가의 거처로 제공했다. 이곳은 왕족이나 외교 사절 등 공화국의 주요 손님들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438년, 곤자가가 베네치아 공화국을 떠나 밀라노와 동맹을 맺자, 1439년 궁전은 또 다른 선장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스포르차 역시 1447년에 공화국을 배신하면서 거주지를 잃게 되었다.

1452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궁전의 소유권을 회수하여 경매에 부쳤고, 1453년 당시 도제였던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이를 낙찰받았다. 포스카리는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베네치아 후기 고딕 양식의 새로운 궁전을 짓도록 명했다. 그는 대운하에 면한 위치를 직접 골랐는데, 이는 도제로서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였다. 포스카리는 30년 이상 지속된 베네치아의 본토(''Terraferma'') 영토 확장 정책을 주도하며 군사적 성공을 이끈 인물이었으며, 궁전의 직접 구매와 재건축은 이러한 그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1457년, 포스카리가 정치적 이유로 실각하여 이 집으로 은퇴할 무렵, 웅장한 새 궁전의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이후 1574년에는 프랑스의 국왕 앙리 3세가 이곳을 방문하여 건물 2층에 머물기도 했다.

2. 2. 카 포스카리 건설

현재 카 포스카리가 있는 자리에는 원래 "두 개의 탑이 있는 집"(Casa delle due torriit)으로 알려진 비잔틴 궁전이 있었다. 1429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건물을 베르나르도 주스티니아니로부터 사들여 공화국의 부(副)선장이자 만토바의 영주였던 잔프란체스코 곤자가의 거처로 삼았다. 이 궁전은 낮은 중앙 건물 양쪽에 탑이 하나씩 있는 구조였으며, 왕족이나 외교 사절 등 공화국의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438년(또는 1439년), 곤자가가 공화국을 떠나 밀라노와 손을 잡자, 건물은 다른 용병대장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1447년(또는 1452년), 스포르차 역시 공화국을 배신하면서 거주지를 빼앗기고 건물은 경매에 나오게 되었다.

1452년(또는 1453년),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던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이 건물을 사들였다. 포스카리는 기존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대운하가 잘 보이는 위치에 새롭고 웅장한 궁전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는 베네치아 후기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설계는 Bartolomeo Bono|바르톨로메오 보노it가 맡았다. 포스카리가 직접 궁전을 구입하고 재건축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30년간 이어진 공화국의 군사적 성공과 테라페르마에서의 영토 확장을 이끈 인물로서, 새 궁전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자 했다.

건설은 1452년에 시작되었으나, 포스카리가 1457년 정치적 이유로 실각하여 물러날 때까지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새로 지은 이 웅장한 궁전에서 죽기 전 단 7일 동안만 머물렀다.

2. 3. 베네치아 공화국 시기



상층에서 카날 그란데를 바라보다


현재 카 포스카리가 있는 자리에는 원래 "두 개의 탑이 있는 집"(Casa delle due torriita)으로 알려진 비잔틴 양식의 궁전이 있었다. 이 건물은 1429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베르나르도 주스티니아니로부터 매입하여, 공화국 군대의 부(副)선장이자 만토바의 영주였던 잔프란체스코 곤자가의 거처로 삼았다. 당시 궁전은 낮은 중앙 부분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탑이 있는 구조였으며, 왕족이나 외교관 등 공화국의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438년 곤자가가 베네치아 공화국을 떠나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동맹을 맺자, 1439년 공화국은 이 궁전을 또 다른 용병대장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주었다. 하지만 1447년, 스포르차 역시 공화국을 배신하면서 거처를 빼앗기게 되었다.

1452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몰수한 궁전을 경매에 부쳤고, 당시 도제였던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이를 사들였다. 포스카리는 기존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운하가 잘 보이는 위치에 새로운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에 걸맞게 건물을 베네치아 후기 고딕 양식으로 웅장하게 재건하고자 했으며, 설계는 Bartolomeo Bono|바르톨로메오 보노ita가 맡았다. 포스카리가 직접 궁전을 구입하고 재건한 것은 당시 30년간 이어진 군사적 성공과 본토에서의 영토 확장을 주도했던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공사는 1452년에 시작되었으나, 1457년 포스카리가 불명예 속에 도제 자리에서 물러나 새 저택으로 은퇴할 때까지도 궁전은 거의 완성되지 못했다. 포스카리는 죽기 전 단 7일 동안만 이 집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이후 카 포스카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빈들을 접대하는 중요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또한 카날 그란데의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여 카날레토, Michele Marieschi|미켈레 마리에스키ita, 프란체스코 과르디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도 등장했다. 베네치아의 전통적인 조정 경기인 Regata Storica|레가타 스토리카ita를 관람하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시기 카 포스카리에서 있었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주요 사건
1513년페데리코 포스카리(Federico Foscari)의 결혼 축하연 개최
1574년프랑스 국왕 앙리 3세 방문 및 2층에 체류
1698년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신분을 숨기고 방문
1750년건물에 화재 발생
1790년포스카리 가문의 마지막 후손 사망


2. 4. 포스카리 가문 이후

1457년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사망한 후, 카 포스카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연도주요 내용
1513년페데리코 포스카리와 조반니 베니에르의 딸의 결혼 피로연이 열렸다.
1516년포스카리 가문의 상속자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유럽 왕족들의 숙소로 제공되었다.
1574년앙리 3세 국왕이 건물의 2층에 머물렀다.
1661년포스카리 가문의 상속자들이 소유권을 되찾아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건물의 일부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임대했다.
1698년표트르 1세 황제가 은밀하게 숙소를 제공받았다.
1750년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1790년궁전에 살았던 포스카리 가문의 마지막 구성원인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궁전의 이름을 지어준 도제와 다른 인물)가 사망했다.
1811년아마추어 배우들이 건물을 점거하여 극장으로 사용했다.
1835년가난한 시민, 화가(대운하의 전망을 위해), 상인(물품 보관소) 등이 건물을 사용했다.
1845년베네치아 시가 건물을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1846년복구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2년 후 중단되었다.
1848년다니엘레 마닌이 이끄는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849년오스트리아베네치아 폭격 당시 피난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 군대의 병영으로 전환되었다.
1868년이탈리아 최초의 상업 고등 교육 기관인 베네치아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본부가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카 포스카리와 인접한 주스티니아니 궁전의 가장 최근 복원은 안전과 실용성의 새로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2004년에 시작되어 2006년 여름까지 진행되었다.

현재 이 궁전은 베네치아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으며, "아울라 바라토"(Aula Baratto)와 "아울라 베렌고"(Aula Berengo)와 같이 아름다운 홀 일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2013년에는 에너지 효율성을 위한 중요한 기술적 조치와 대학 측의 엄격한 환경 관리 덕분에 LEED 지속 가능성 인증을 획득했다. 이는 [https://www.usgbc.org/articles/oldest-leed-certified-building-world 이 권위 있는 인증을 받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 5. 카 포스카리 대학교

1868년 이 궁전은 베네치아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본부가 되었다. 현재 이 궁전은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본부이며, "아울라 바라토"와 "아울라 베렌고"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홀 중 일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카 포스카리와 인접한 주스티니아니 궁전의 가장 최근 복원은 2004년에 의뢰되어 안전과 실용성의 새로운 요구 사항을 충족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작업은 2004년 1월부터 2006년 여름까지 진행되었다.

2013년, 에너지 효율성을 위한 일련의 중요한 기술적 조치와 카 포스카리 대학교가 시행한 엄격한 환경 관리 관행 덕분에 이 건물은 LEED 지속 가능성 인증을 획득하여, [http://www.usgbc.org/articles/oldest-leed-certified-building-world 이 권위 있는 인증을 획득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되었다.

2. 6. 복원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는 1936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카 포스카리를 복원했다. 1936년의 첫 복원에서는 현관, 1층 회의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간인 "아울라 바라토"(Aula Baratto)가 정비되었다. 1956년의 두 번째 복원에서는 부아즈리가 만들어졌다.

가장 최근의 복원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인접한 주스티니아니 궁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 복원은 건물의 안전과 실용성에 대한 새로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2013년, 카 포스카리는 LEED 지속 가능성 인증을 받았다. 이는 카 포스카리 대학교가 시행한 에너지 효율성 향상을 위한 중요한 기술적 조치와 엄격한 환경 관리 덕분이었다. 이로써 카 포스카리는 [http://www.usgbc.org/articles/oldest-leed-certified-building-world 이 권위 있는 인증을 획득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되었다.

3. 건축

카 포스카리는 베네치아 귀족과 상인의 전형적인 거주지로 설계되었으며, 도시의 주요 교통로인 대운하를 향해 가장 화려한 정면을 두고 있다. 이 건물은 베네치아 고딕 건축 양식, 특히 플로럴 고딕 양식의 중요한 예시로 평가받는다. 현재의 건물은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기존에 있던 '두 개의 탑의 집'이라 불리던 건물을 허물고, 도제 궁전을 참고하여 대저택(Domus Magna|도무스 마그나la)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베네치아의 다른 궁전들과 마찬가지로 카 포스카리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무역 활동의 본부, 즉 "폰다코"의 기능을 겸하도록 지어졌다. 이는 토지 재산보다는 해상 무역을 통해 수입을 얻었던 베네치아 귀족들의 생활 방식을 반영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용도에 따라 건물의 층별 기능이 구분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층은 상품 보관 및 하역을 위한 창고 공간으로, 상층부인 2층과 3층(피아니 노빌리)은 공식적인 접견이나 사적인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3. 1. 외관

카 포스카리,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 건너편에서 본 모습. 브루클린 박물관 기록 보관소, 굿이어 기록 보관 컬렉션


카 포스카리는 베네치아 귀족과 상인의 전형적인 거주지로, 도시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 중 하나이다. 외부 안뜰은 940m2 크기로, 베네치아의 개인 주택 중 가장 크며, 전체적으로는 도제 궁전 다음으로 넓다.[1][2] 다른 궁전들과 마찬가지로 카 포스카리의 주요하고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정면과 입구는 도시의 주요 교통로인 대운하를 향하고 있다.[3] 이 정면은 리듬감 있는 일련의 아치와 창문으로 특징지어진다. 플로럴 고딕으로 알려진 이 양식은 도시 전체에서 모방되었으며, 뾰족한 아치와 조각된 창문 머리로 구별할 수 있다.[3] 카 포스카리에서는 각 기둥 상단이 조각된 사엽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고딕 양식의 주두는 잎, 동물, 가면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3] 고딕 창문 위에는 공화국의 선장으로서 도제의 역할을 상징하는 웅크린 사자가 있는 투구가 조각된 대리석 프리즈가 있다.[3] 중앙 투구 양옆으로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 달린 성 마르코의 사자가 그려진 포스카리 가문의 문장 방패를 든 두 명의 푸토가 있다.[3]

베네치아 궁전의 실용적인 기능은 다른 이탈리아 도시의 궁전과 차이가 있었다. 베네치아 귀족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토지 재산이 아닌 항해와 무역으로 수입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의 "폰다코" 가옥은 거주지이자 무역 활동의 본부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초기 궁전의 주요 특징은 해안가를 따라 설치된 2층짜리 아케이드 또는 로지아였다. 1층에는 상품을 싣고 내리는 포탈이 있었고, 이 포탈은 종종 사업 협상에 사용되는 현관(포르티코)으로 연결되었다. 현관 양옆에는 창고와 사무실이 있었고 뒤쪽에는 주방이 위치했다. 거실은 위층에 있었으며, 방들은 T자형 중앙 방에서 이어졌다. 안뜰에는 우물과 개방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면 양 끝에는 낮은 탑이 있었는데, 카 포스카리의 전신인 "두 개의 탑의 집" 역시 이러한 구조였으나, 프란체스코 포스카리가 탑을 허물고 베네치아 고딕 건축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거래의 홀


현재 카 포스카리의 1층은 창고로 사용되었고, 2층과 3층(피아니 노빌리)은 각각 공식적인 접대와 개인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었다.[3] 이 두 주요 층의 중앙 로지아는 더 잘 알려진 도제 궁전의 아케이드와 유사한 베네치아 플로럴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다.[3] 위아래로 이어진 로지아는 현재 유리로 마감되어 뒤쪽의 넓은 홀을 밝혀준다.[3] 로지아 양옆으로는 더 작은 방들을 포함하는 날개 건물이 있다.[3] 과거 "두 개의 탑 건물"은 주거 공간 외에 창고를 갖추고 있었지만, 새로 지어진 건물은 대저택(Domus Magna|도무스 마그나la)으로 건설되었다. 파사드는 도제 궁전과 유사하며, 특히 2층의 창문이 정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힌다.

3. 2. 내부

베네치아의 다른 궁전들처럼 카 포스카리도 거주지이자 무역 활동의 본부 역할을 겸하도록 설계되었다. 초기 베네치아 궁전은 1층에 상품을 싣고 내리는 포탈과 사업 협상을 위한 현관(포르티코), 창고, 사무실 등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층에는 거실이 위치했다.

카 포스카리의 내부는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를 따르면서도 웅장하게 구성되었다.

  • 1층: 주로 창고로 사용되었다.
  • 2층과 3층: '피아니 노빌리'라고 불리며, 각각 공식적인 손님 접대와 개인적인 주거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 두 층의 중앙에는 로지아(개방형 복도)가 있는데, 이는 도제 궁전의 아케이드와 비슷한 베네치아 플로럴 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 이 로지아는 유리로 마감되어 뒤편의 넓은 홀에 빛을 들인다. 로지아 양쪽으로는 작은 방들을 포함한 날개 구조가 이어진다.


건물 내부에는 현관이 있으며, 특히 2층에는 '교역의 홀(Aula Baratto)'이라는 이름의 넓은 홀이 있다. 이 홀은 카 포스카리가 대학 건물로 사용되면서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교역의 홀 벽면에는 두 점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 마리오 시로니가 그린 ''Venezia, l’Italia e gli studi''|베네치아, 리탈리아 에 글리 스투디it (1936년)
  • 마리오 델루이지(Mario Deluigi)가 그린 ''La scuola''|라 스쿠올라it (1936년)

3. 3. 포털

카 포스카리의 포털은 현재 건물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08년에 복원되었다. Pietra d'Istria|이스트리아 석ita으로 불리는 이스트리아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직사각형 형태 위에 초승달 장식(lunette)이 올려진 구조이다. 포털 주변은 체크무늬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초승달 장식 내부에는 중앙의 문장과 이를 둘러싼 세 명의 푸토가 있다. 푸토는 문장의 양옆과 위쪽에 각각 배치되어 방패 형태의 문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문장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 달린 성 마르코의 사자가 열린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179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함락되면서 귀족 가문의 문장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카 포스카리의 문장 역시 다른 가문의 문장들처럼 철거되거나 숨겨졌는데, 이곳에서는 하얀 석회로 덧칠해 가려졌다. 이후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4. 내부 공간

카 포스카리 궁전의 내부는 여러 중요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의 손길을 거쳐 현대적으로 복원된 부분이 많다. 1층의 현관은 1936년 스카르파가 복원하여 유리 벽 입구 등을 특징으로 한다.

궁전의 2층(피아노 노빌레)에는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마리오 바라토 홀(Aula Baratto)이 있다. 이 대강당은 이탈리아 문학 교수이자 반파시스트였던 마리오 바라토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이곳 역시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에 참여하여 창문, 보아저리 등을 디자인했으며, 대운하를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강당 내부에는 마리오 시로니와 마리오 델루이지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4. 1. 현관

1936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가 현관을 복원하였다. 이때 스카르파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설계했다.

  • 2층 대강당의 창문을 연상시키는 유리 벽 입구
  • 벤치(가구) (카를로 스카르파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전형적인 T자형 패턴)
  • 19세기의 계단 난간
  • 램프


궁전의 19세기 램프

4. 2. 마리오 바라토 홀 (Aula Baratto)

카 포스카리 - 마리오 바라토 강당


마리오 바라토 홀은 1984년 사망한 이탈리아 문학 교수이자 반파시스트였던 마리오 바라토에게 헌정된 대강당으로, 궁전의 2층(피아노 노빌레)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 공간은 카 포스카리 대학의 컨퍼런스, 컨벤션, 공식 행사, 고급 훈련 과정 및 중요한 행사를 위해 사용된다.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는 기존의 상업 박물관을 대체하여 이 강당을 설계했으며, 강당 입구에는 "STUDIA DECUS ORNAMENTUMQUE VITAE"(공부는 삶의 영광이자 장식이다)라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진 거대한 문이 있다.

강당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창문, 보아저리, 풋보드
  •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마리오 시로니와 마리오 델루이지가 그린 두 점의 프레스코
  • 대운하의 가장 큰 굴곡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


1979년에 발생한 화재로 강당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이후 건축가 발레리아노 파스토르가 강당과 보아저리를 복원했다. 특히 화재로 심하게 손상되었던 스카르파의 보아저리는 그의 제자였던 파스토르가 1956년 스카르파와 함께 작업했던 장인들을 다시 불러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1]

강당의 프레스코화는 마리오 시로니와 마리오 델루이지의 작품이다. 시로니의 작품은 1935년에서 1937년 사이, 당시 총장이었던 아고스티노 란칠로의 요청으로 제작되었다. 시로니는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청년들의 신념과 열정을 표현할 예술가로 여겨져 발탁되었다.[2][3]

2004년에는 건물 전체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강당이 다시 한번 복원되었다. 이때도 카를로 스카르파와 함께 일했던 장인들이 보아저리 복원에 참여했으며, 현재 강당에서 사용되는 의자들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4. 2. 1. 마리오 시로니의 프레스코화: ''Venezia, l'Italia e gli Studi''

1935년에서 1937년 사이, 당시 총장이었던 아고스티노 란칠로의 요청으로 마리오 시로니는 카 포스카리 대강당(마리오 바라토 강당)을 장식하는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시로니는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청년들의 신념과 열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화가로 여겨져 발탁되었다.

그가 그린 프레스코화 ''Venezia, l'Italia e gli Studi'' (베네치아, 이탈리아 그리고 연구)는 여러 상징적인 인물과 요소들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Venezia, l'Italia e gli Studi'' 프레스코화의 주요 요소
요소설명
학생 운동선수책과 소총을 들고 있으며, 파시스트 대학 그룹을 상징한다.
기술의 알레고리바퀴에 기대어 있는 여성으로 표현되었다.
의학의 알레고리카두세우스를 든 여성으로 표현되었다.
베네치아왕좌에 앉아 카 포스카리가 묘사된 접시를 들고 있는 여성으로 도시를 의인화했다.
성 마르코의 사자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의 돔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조국에티오피아에 대한 이탈리아의 승리를 나타내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이탈리아가 스스로 할 것이다(L'Italia farà da sè)"라는 비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가 추구했던 자급자족 정책과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낸다.[2]


4. 2. 2. 마리오 데 루이지의 프레스코화: ''La scuola''

마리오 델루이지는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두 사람 모두 베네치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고 디자인 및 도시 계획 분야에서 협력했다. 데 루이지는 아카데미에서 조각가 아르투로 마르티니의 조교로 일했으며, 이후 베네치아 건축 대학교(IUAV)에서 무대 미술을 가르쳤다.

처음에 데 루이지는 카 포스카리 궁전 1층의 방을 장식하도록 요청받았다. 그가 1936년에 그린 프레스코화 ''La scuola'' (학교)는 이후 2층에 위치한 마리오 바라토 강당(이탈리아어: Aula Baratto)으로 옮겨졌다. 이 작품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철학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마리오 바라토 강당에는 데 루이지의 작품 외에도 동시대 화가인 마리오 시로니가 같은 해(1936년)에 그린 프레스코화 ''Venezia, l’Italia e gli studi'' (베네치아, 이탈리아 그리고 연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4. 3. 카를로 스카르파의 건축적 개입



이탈리아 문학 교수이자 반파시스트였던 마리오 바라토(Mario Baratto, 1984년 사망)에게 헌정된 대강당은 궁전 2층(피아노 노빌레)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 공간은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주요 행사, 콘퍼런스, 고급 훈련 과정 등에 사용된다.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는 기존의 상업 박물관을 대체하여 이 대강당을 설계했으며, "STUDIA DECUS ORNAMENTUMQUE VITAE"(공부는 삶의 영광이자 장식이다)라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진 입구를 통해 강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강당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카를로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요소: 창문, 보아저리, 풋보드 등
  • 마리오 시로니와 마리오 데 루이지가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그린 프레스코화 두 점
  • 대운하의 가장 큰 굴곡을 조망할 수 있는 경관


1936년, 카를로 스카르파는 처음으로 대강당을 포함한 카 포스카리 대학교의 여러 공간을 복원하고 개조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1956년, 스카르파는 대강당을 강의실로 바꾸기 위해 다시 초청받았으며, 이때 그는 특징적인 보아저리 요소를 디자인했다. 스카르파가 개입하기 전, 이 공간은 경제학부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스카르파의 1956년 대강당 프로젝트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 15세기 고딕 양식 창문(폴리포라) 앞에 설치된 유리와 나무로 된 창틀
  • 라틴 비문이 새겨진 대리석 판과 두 개의 받침대가 있는 나무 플랫폼
  • 나무 연단
  • 라틴 비문이 새겨진 대리석 문


카 포스카리: 카를로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보아저리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보아저리이다. 그는 기존 학생 연단을 철거하고, 그곳에 사용된 목재 일부를 재활용하여 이 보아저리 패널을 만들었다. 이 보아저리는 강당과 복도 사이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미닫이식 천으로 덮인 프레임은 필요에 따라 공간을 가릴 수 있으며, 닫혔을 때는 고딕 창문의 오지브(첨두 아치) 형태를 연상시킨다. 또한, 고딕 창문의 모습이 보아저리의 유리에 반사되어 독특한 조명 효과를 만들어낸다.

1979년 화재로 강당 일부와 보아저리가 손상되었으나, 스카르파의 제자였던 건축가 발레리아노 파스토르(Valeriano Pastor)가 1956년 스카르파와 함께 작업했던 장인들과 협력하여 복원했다.[1] 이후 2004년, 건물 전체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강당이 다시 한번 복원되었으며, 이때도 스카르파와 작업했던 장인들이 참여하여 보아저리를 복원하고 현재 사용되는 의자를 제작했다.

한편, 강당에 있는 두 점의 프레스코화는 1935년에서 1937년 사이 마리오 시로니가 총장 아고스티노 란칠로의 요청으로 그린 것이다. 시로니는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청년들의 신념과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로 평가받아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연구'라는 제목의 프레스코화에는 책과 총을 든 학생 운동선수, 기술과 의학의 알레고리, 왕좌에 앉은 베네치아 시의 의인화, 성 마르코의 사자, 대성당 돔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 침공을 통한 이탈리아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국'이라는 족쇄에 묶인 인물과 그 위에 "이탈리아가 스스로 할 것이다"(L'Italia farà da sèita)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가 추구했던 자급자족 정책과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낸다.[2] 다른 프레스코화는 '철학자 학교'를 묘사하며, 중앙의 사상가와 그를 둘러싼 학생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이면서도 삼차원적 요소를 포함하며, 파블로 피카소후안 그리스의 양식, 조르주 브라크의 색채 사용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는다.[3]

참조

[1] 서적 La sede storica dell'Università Ca' Foscari : risanamento e riutilizzo : atti del Convegno : Auditorium Santa Margherita, 22 novembre 1997 Università Ca' Foscari di Venezia 1998
[2] 서적 Sironi : opere 1919 - 1959 ; Cagliari, Castello di San Michele, 6 luglio - 29 settembre 2002 Charta 2002
[3] 서적 Mario De Luigi Studio d'arte Barnabò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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